노 선공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노 선공은 노나라의 제21대 임금으로, 기원전 609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591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아버지 노 문공 사후, 동문양중의 지원을 받아 적자 자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노나라 공실의 권위는 약화되고 삼환씨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제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있었으며, 진나라와의 관계는 껄끄러웠다. 또한, 토지세를 부과하는 등 국내 정치를 운영했다. 선공은 18년 만에 사망했으며, 아들 흑굉이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591년 사망 - 초 장왕
초 장왕은 즉위 초 혼란을 겪었지만 3년간의 은둔 후 국정을 개혁하여 춘추 시대 패업을 달성하고, 포용력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춘추오패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 기원전 7세기 출생 - 아이소포스
아이소포스는 기원전 6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화 작가이지만, 실존 여부, 출생지, 노예 생활, 웅변술, 징조 해석 능력, 여러 인물과의 교류, 아테네에서의 활동, 사망 경위, 저술 여부, 외모, 아프리카 기원 등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 기원전 7세기 출생 -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기원전 7세기 유다 왕국의 예언자로, 예루살렘 멸망과 바빌론 포로를 예언하며 고난을 겪어 "우는 예언자"라고도 불리며 그의 예언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노나라의 군주 - 노 환공
노 환공은 춘추 시대 노나라의 제16대 군주로, 혜공의 아들이며 은공의 섭정 후 즉위하여 18년간 재위했으나 제나라 방문 중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들은 훗날 노나라 권력을 장악한 삼환의 시조가 되었다. - 노나라의 군주 - 노 장공
춘추 시대 노나라의 제16대 군주인 노 장공은 제나라와의 잦은 전쟁과 외교적 활동을 펼쳤으며, 제나라 내전 개입과 제 환공과의 화평을 통해 영토를 회복하기도 했으나, 후계자 선정 실패로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노 선공 |
---|
2. 사적
기원전 591년, 선공은 재위 18년 만에 죽었고, 아들 흑굉이 뒤를 이었다.[7]
2. 1. 즉위 과정
아버지 노 문공 생전, 어머니 경영과 공자 퇴(후의 노 선공)는 사사로이 동문양중을 섬겼다.[7] 기원전 609년, 아버지가 죽자 동문양중은 숙손득신과 손잡고 이웃 제 혜공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악을 죽이고 공자 퇴를 옹립했다.[7] 서자인 선공이 적자인 자악을 죽이고 임금이 된 이 사건을 계기로, 노나라 공실은 쇠퇴해지고, 선공의 고조부 환공의 아들에서 갈려나온 삼환이 강성해졌다.[7]태자 투는 노나라 문공과 그의 후궁 중 한 명인 경영(敬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공의 총애를 받았지만, 태자 투는 어머니가 후궁이었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대신, 기원전 609년 문공이 사망한 후, 공위를 이을 사람은 태자 오(惡)였다.
동문상중(Prince Sui)은 문공의 삼촌이자 신하로, 태자 오의 즉위를 반대했고, 경영과 "사적인 관계"[1]를 맺어 태자 오를 태자 투로 교체하려 했다. 신하 숙중팽생의 반대에 직면한 태자 수는 제나라 혜공의 지원을 요청했고, 혜공은 최근 즉위하여 노나라를 동맹으로 삼고 싶어 했기에 돕기로 동의했다.
몇 달 후, 태자 수는 형제인 태자 오와 태자 시(視)를 죽이고 태자 투를 노나라 공으로 세웠다.
2. 2. 대외 관계
기원전 608년, 제나라는 기수 서쪽의 노나라 영토를 점령했다. 이 영토는 기원전 629년 희공 재위 기간에 노나라가 획득한 것으로, 당시 선공을 지원한 대가였다. 같은 영토는 기원전 599년에 노나라로 반환되었다. 춘추좌전은 이를 "우리의 굴복 때문"이라고 언급했으며, 그 사이 10년 동안 선공이 제나라를 네 번 방문했다고 언급했다.기원전 602년, 선공은 진나라, 송, 위, 정, 조의 군주들과 흑양(黑壤)에서 만났다. 진나라와 노나라의 관계는 껄끄러웠는데, 기원전 606년 진 성공이 즉위했을 때 선공은 그를 방문하거나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진 성공은 회의에서 선공을 억류했지만, 선공은 뇌물을 제공하여 탈출했다. 이 회의는 조약이었지만, 춘추는 조약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이 사건을 "회동"이라고 언급했다. 좌전은 이것이 "우리 군주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언급했다.
2. 3. 국내 정치
아버지 노 문공 생전, 어머니 경강과 공자 퇴(후의 노 선공)는 사사로이 동문양중을 섬겼다. 기원전 609년, 아버지가 죽자 동문양중은 숙손득신과 손잡고 이웃 제 혜공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악을 죽이고 공자 퇴를 옹립했다.[7] 서자인 선공이 적자인 자악을 죽이고 임금이 된 이 사건을 계기로, 노나라 공실은 쇠퇴해지고, 선공의 고조부 환공의 아들에서 갈려나온 삼환이 강성해졌다.[7]기원전 608년, 제나라는 기수 서쪽의 노나라 영토를 점령했다. 이 영토는 기원전 629년 희공 재위 기간에 노나라가 획득한 것으로, 당시 선공을 지원한 대가였다. 같은 영토는 기원전 599년에 노나라로 반환되었다. ''춘추좌전''은 이를 "우리의 굴복 때문"이라고 언급했으며, 그 사이 10년 동안 선공이 제나라를 네 번 방문했다고 언급했다.
기원전 602년, 선공은 진나라, 송, 위, 정, 조의 군주들과 흑양(黑壤)에서 만났다. 진나라와 노나라의 관계는 껄끄러웠는데, 기원전 606년 진 성공이 즉위했을 때 선공은 그를 방문하거나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사실, 진 성공은 회의에서 선공을 억류했지만, 선공은 뇌물을 제공하여 탈출했다. 이 회의는 사실 조약이었지만, ''춘추''는 조약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이 사건을 "회동"이라고 언급했다. ''좌전''은 이것이 "우리 군주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언급했다.
기원전 594년, 노나라는 初税亩|초세무|토지세중국어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공양전''은 토지세가 처음으로 토지 면적에 따라 부과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으며, 이는 10%로 고정되어 있었다.[2]''좌전''은 "세금은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1]
기원전 591년, 귀보는 동문씨의 일원으로서, 세력가인 삼환을 폐위시키고 공작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선공과 공모했다. 그해 가을, 귀보는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진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같은 해 겨울, 선공이 사망했다. 삼환의 일원인 계손씨의 일원인 기문자는 귀보를 추방했고, 귀보는 제나라로 도망쳤다.
3. 가정
노 선공의 아버지는 노 문공이며, 생모는 제2비인 경영이다. 노 선공의 정비는 애강이다.[5]
노 문공은 정실 부인 강씨와의 사이에 두 명의 공자를 두었으나, 동문양중(공자 수, 장공의 아들)이 노 문공의 두 번째 부인 경영과 사통하여 강씨의 두 공자를 죽이고 경영의 아들 왜(노 선공)를 세웠다. 강씨는 친정인 제로 돌아갔다.[5]
참조
[1]
서적
Zuo Tradition/Zuozhuan: Commentary on the "Spring and Autumn Annal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
서적
The Gongyang Commentary on The Spring and Autumn Annals: A Full Translation
Palgrave Macmillan
[3]
문서
春秋左氏伝 宣公十八年十月壬戌条による
[4]
문서
史記
[5]
문서
春秋左氏伝 文公18年
[6]
문서
春秋左氏伝 宣公18年
[7]
서적
사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